오늘은 조금 무겁지만, 많은 유학생분들이 어쩌면 한 번쯤 겪으셨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바로 미국 대학원 생활 중 영어 때문에 겪었던 아찔한 트라우마와 그걸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지에 대한 제 경험담입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손이 떨리지만, 혹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와 용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용기를 내어 글을 써봅니다.

## C+ 학점, 그리고 시작된 악몽
미국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일상적인 영어 소통에는 큰 불편함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예전엔 전화 통화도 덜덜 떨면서 받았는데, 그땐 제법 자연스러워졌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영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어요. 이게 문법적으로 맞나, 이 표현이 자연스러운가, 수십 번을 고치고 또 고쳤죠.
### 반가웠던 한국인 교수님, 하지만…
대학원에 한국인 교수님이 계셨어요.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 교수님이라니, 처음엔 정말 반가웠답니다. 한국에서 존경하던 교수님과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이 교수님과도 잘 지내고 싶었어요. 수업 끝나고 이런저런 조언도 구하고, 제 상황에 대해 여쭤보기도 했었죠. 하지만 뭔가 저를 특별히 아껴주신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죠.
### 충격의 C+ 학점
그러던 어느 날, 한 과제에서 C+를 받았어요. 대학원에서, 과제를 안 낸 것도 아니고 나름 열심히 해서 냈는데 C+라니… 정말 흔치 않은 상황이잖아요? 한국에서 꽤 괜찮은 교육기관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과제였기에 더욱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그렇게 영어를 못 썼나?’, ‘내가 뭘 잘못 이해하고 쓴 거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어요. 그 점수는 제게 큰 충격이었고, 앞으로 닥쳐올 일들의 서막에 불과했답니다.
### 이해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 아이디어 지적
얼마 후, 수업에서 개인 과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저는 당시 오페어 아이들 집에서 지내고 있었고, 한국에서 가르쳤던 아이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교류하는 작은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었어요. 오페어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에게 영어를, 한국 아이들은 미국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려주며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될 거라 생각했거든요. 다른 수업에서 비슷한 국제 교류 연구 사례를 긍정적으로 다룬 적도 있어서, 제 경험을 살릴 좋은 기회라고 믿었어요.
하지만 교수님의 반응은 싸늘했어요. 제가 아이디어를 설명하자, 교수님은 코웃음을 치시며 말씀하셨죠. “아니, 어린 유아에게는 손에 닿고 실질적인 것에서 세상을 탐색하는 게 발달적으로 적합한데, 다른 나라 아이들과 교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라고요.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다른 수업에서 본 연구 사례를 언급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어요.
## 무너져 내린 자존감과 눈물의 밤
그날 교수님과의 대화는 제게 깊은 상처를 남겼어요. 단순히 프로젝트 아이디어에 대한 지적을 넘어선 이야기들이 오고 갔거든요.
### “네 과제,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교수님은 제 최근 C+ 받은 과제를 언급하시며 “네가 지금, 네 과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라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려면 오페어 일도 줄이고, 남자친구도 만나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공부만 해도 될까 말까야.” 라는 말까지 덧붙이셨죠. 다른 수업에선 제 과제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너무나 큰 충격이었어요.
### 과거 경력까지 폄하하는 발언들
심지어 “한국에서 오래된 옛날 방식으로 교육하는 걸 배워와서 그렇다. 여기서 네 동기들한테나 배워라.” 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제 동기들은 저와 경력도 비슷했고, 서로 배울 점이 있는 동등한 위치였는데 말이죠. 제가 한국에서 일했던 기관과 동료들의 노력까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어요. 마치 저를 허영심에 가득 찬, 아무것도 모르는 유학생으로 낙인찍고 짓밟는 듯한 느낌이었죠. 모욕감이 온몸을 휘감았어요.
### 멈추지 않던 눈물
꾹 참고 겨우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빠져나왔어요.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어요.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캄캄했죠. 지금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있었던 일을 쏟아내며 엉엉 울었어요. “내가 그렇게 멍청해? 내가 그렇게 무능력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죠. 차에 타서도 한참을 울다 보니 운전할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제가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 트라우마를 안고 버티기, 그리고 작은 위안들
교수님은 아마 충격요법으로, 제가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과 과거 경력까지 깎아내리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희망을 주며 이끌어주셨어야 했는데…
### 오기와 버티기 전략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교수님을 개인적으로 찾아가지 않았어요. 한국어도 쓰지 않았고, 어떤 조언도 구하지 않았죠. 거리를 유지했어요.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수업도 피하지 않고 들었고, 연애도, 오페어 가족과의 관계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대학원은 제 삶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니까요.
### 예상치 못한 칭찬, 그리고 씁쓸함
몇 달이 지나고, 어린이집 원장님께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하고 약혼도 했어요. 신기하게도 그 교수님 수업의 과제 점수도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어요. B를 거쳐 A를 받기도 했죠. 어느 날, 교수님이 저를 보시더니 “그 어린이집 원장님이 너 일 잘한다고 칭찬하더라. 역시 경력자가 와서 다르다.” 라고 영어로 웃으며 말씀하시더군요. 참나, 몇 달 만에 ‘역시’라니. 씁쓸한 웃음이 나왔어요. 본인의 그 날카로운 말들이 제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모르셨을 거예요.
### 논문 지도, 또 다른 시련과 다행
논문 지도교수를 정할 때, 또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그 교수님을 선택했어요. 컨셉을 설명하는데 제 말을 자르시며 “그래서 데이터가 어딨는데?” 라고 다른 동료들 앞에서 면박을 주셨죠. 그런데 초고를 읽어보시더니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다른 B 교수님이 이 분야 전문가시니 그분께 지도를 받으라고 하셨어요. 정말 천만다행이었죠! B 교수님은 정말 온화한 분이셨거든요. 제가 잔뜩 긴장해서 말도 안 되는 글을 써가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일단 써봐요.”라며 토닥여주셨어요.
### 내 편이 있다는 것의 소중함
정말 힘들 때마다 남편에게 “나 이거 그만둘 수도 있어.” 라고 수십 번은 말했던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남편은 “정 힘들면 그만둬도 돼. 근데 너 정말 잘하고 있어. 외국 와서 제2외국어로 논문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대단해.” 라며 저를 다독여줬어요. 논문 초고를 들고 덜덜 떨며 교수님을 만나고 돌아온 날, 남편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 타르트를 예쁜 노란 그릇에 담아 준비해뒀더라고요. 늦은 밤, 따뜻한 조명 아래 차 한 잔과 달콤한 치즈 타르트… 그 온기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나는 잘하고 있고,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 혹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 글을 쓰면서도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나네요. 머리도 아프고요. 하지만 저는 무사히 졸업했고, C+를 받았던 그 과제 외에는 낮은 점수를 받은 적이 없어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죠. 존버는 승리… 비슷한 걸 한 셈이에요. ^^
다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저를 따라다니며 영어로 뭔가를 쓸 때마다 저를 조금 두렵게 만들어요. 혹시 저와 비슷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거나, 자신을 자꾸만 깎아내리는 분들이 계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 괜찮을 거라고요. 버티는 것이 너무 힘들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리고 우리에겐 챗 GPT도 있고, 논문을 위해서라면 Grammarly 같은 훌륭한 도구들도 있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거예요. 최악의 상황이 와서 다 그만두게 되더라도 세상은 망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당신은 여전히 소중한 존재니까요. 모두 힘내세요!